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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이 글은 우리나라가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특히 봄철마다 찾아오던 보릿고개와 서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꿀꿀이죽에 대해 다룬 글입니다.
1950~1960년대 농촌에서는 식량이 떨어지면 쑥, 냉이, 칡뿌리, 나무껍질까지 이용해 생계를 이어갔고, 도시에서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로 만든 꿀꿀이죽이 값싼 한 끼를 대신했습니다. 글은 당시의 참혹한 현실과 그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지혜와 끈기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움의 뿌리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 줍니다.

보릿고개, 봄철마다 찾아오던 배고픔의 계절
오늘날에는 사계절 내내 마트나 시장에서 다양한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편의점이나 음식 배달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 세대가 살던 지난 시절에는 봄만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배고픔을 걱정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릿고개입니다.
보릿고개는 보리를 수확하기 전까지 식량이 바닥나 버려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기 힘든 시기를 말합니다. 보통 3월부터 6월까지가 그 시기였으며, 특히 농촌에서는 지난해 수확한 곡식이 이미 떨어지고, 새로운 보리는 아직 익지 않은 상황이어서 먹을 것이 전혀 없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농촌 가정에서는 쌀이나 보리는 이미 겨울철에 다 먹고 없었고, 남아 있는 것은 잡곡 몇 줌이나 무말랭이, 마른 나물뿐이었습니다. 이마저도 하루에 한 끼 정도만 먹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들에서 구한 쑥이나 냉이 같은 산나물로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많은 가정이 쑥을 캐기 위해 산과 들로 향했고, 칡뿌리를 캐기 위해 아이들도 함께 나섰습니다. 온 가족이 식량을 찾기 위해 땀 흘리던 그 시절의 봄은, 지금처럼 따뜻한 계절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의 계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풀로 끓인 죽이 주요한 식사였습니다. 보리 한 줌에 쑥이나 냉이를 넣어 끓인 나물 죽은 맛을 낼 수 있는 재료가 없어 심심하고 허기만 더해졌지만, 그것마저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날은 그 죽조차 먹지 못하고 굶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손과 발이 붓고, 어른들도 기운이 빠져 일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부와 기관에서는 식량이 부족한 가정을 돕기 위해 원조 곡물이나 식량 배급을 하기도 했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가정이 혜택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보릿고개는 단지 몇 해의 문제가 아니라, 해마다 반복되던 계절 속 고통이었습니다.
보릿고개는 단순히 배고픔을 넘어 삶의 희망이 흔들리던 시기였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밥이라도 챙기기 위해 스스로는 끼니를 거르고, 아이들은 밥 한 공기를 꿈꾸며 잠들었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한 끼의 소중함을 몸으로 익혔고, 먹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매일같이 느끼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점점 잊히고 있지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우리가 누리는 현재의 풍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 줍니다. 식탁에 오르는 한 끼가 당연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봄, 그것이 바로 보릿고개라는 말속에 담긴 삶의 기록입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한 날들
보릿고개가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삶은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밥상 위에 놓일 곡식은커녕 죽조차 끓일 재료가 부족했던 시절,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과 들로 나가야 했습니다. 밭에서 자라던 농작물이 아닌, 자연 속에서 자라는 풀과 뿌리, 나무껍질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자주 들리던 말 중 하나가 바로 초근목피입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사람들은 땅속뿌리와 나무의 껍질을 씹으며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봄이 오면 농촌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보다 산으로 들로 나가 쑥, 냉이, 질경이, 민들레 같은 들풀을 뽑았습니다. 어른들은 칡뿌리와 도토리를 캐기 위해 깊은 산속까지 걸어갔습니다. 특히 칡뿌리는 전분이 많아 죽을 끓이거나 떡을 만들 수 있었기에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칡뿌리도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땅을 파고 또 파야 했고, 힘겹게 캐낸 뿌리는 다시 손질하고 말려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풀뿌리로도 부족할 때, 사람들은 나무껍질까지 벗겨내어 먹었습니다. 특히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겨 삶아낸 뒤 수수나 조, 보리 등과 함께 죽을 끓여 먹었는데, 이를 송기죽이라고 불렀습니다. 송기죽은 먹기에 거칠고 쓴맛이 있었지만,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무껍질을 뜯기 위해 산으로 향했고, 소나무의 껍질이 이곳저곳에서 벗겨져 나간 흔적이 마을 주변 산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풀과 나무에서 끌어낸 한 끼 식사는 정성을 다해 끓인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풀뿌리와 나무껍질로만은 하루 세끼를 제대로 채울 수 없었고, 대부분 사람들은 하루 한 끼 정도로 간신히 버티는 날이 많았습니다. 영양이 부족해져 손발이 붓는 부종이 생기거나, 아이들이 기운이 없어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당시 정부와 지역기관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원조 식량을 배급하거나 구호 조치를 펼쳤지만,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물량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도움을 받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어떤 마을은 일주일 내내 굶은 채 기다려도 구호식량이 오지 않아 산에서 더 많은 뿌리를 캐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버틴 날들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족을 지키고 생명을 이어간 끈질긴 생존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 이웃과 가족들이 겪었던 현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먹을 것의 소중함을 잊지 않도록 일깨워주는 교훈입니다. 식탁에 오르는 쌀 한 톨, 나물 한 그릇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도시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준 꿀꿀이죽
농촌에서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했다면, 도시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바로 꿀꿀이죽이었습니다. 꿀꿀이 죽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돼지 먹이처럼 이것저것 남은 재료를 한데 끓여 만든 음식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말입니다.
사실 꿀꿀이 죽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를 모아 다시 끓여 만든 죽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유엔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서울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 근처에서는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꿀꿀이죽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한 그릇에 몇십 환이면 살 수 있었고, 양도 많아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꿀꿀이 죽은 미군 부대에서 버려진 고기, 햄, 소시지 조각, 채소 찌꺼기, 심지어는 통조림의 남은 부분까지 모아 큰 솥에 끓여 만들었습니다. 가끔은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건질 수 있는 행운이 있었지만, 담배꽁초 같은 이물질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어 그리 위생적이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꿀꿀이 죽은 도시 서민들의 한 끼 식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 일용직 노동자나 노점상, 무직자, 아이들까지도 단돈 몇십 환을 손에 쥐고 꿀꿀이죽 가게 앞에 모였습니다. 아침이면 가게 앞에 큰 솥이 끓기 시작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 앞에는 허기를 달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누구는 숟가락을 챙겨 오고, 누구는 그릇을 들고 와 가득 담아갔습니다. 이처럼 꿀꿀이 죽은 값싸고 양 많은 음식이었기에 하루를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꿀꿀이 죽은 음식으로서의 모습뿐 아니라 시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배고픈 시절, 모두가 가난했던 시기, 식사를 해결하는 것조차 큰 일과 같았던 그 시절을 떠올릴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음식이 바로 꿀꿀이죽입니다. 이 꿀꿀이 죽은 훗날 부대찌개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햄과 소시지, 통조림 재료에 고추장과 김치, 떡 등을 넣고 다시 끓여낸 것이 부대찌개의 시작입니다. 처음에는 미군 부대 근처에서만 볼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리법이 자연스럽게 퍼지고,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 음식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가난한 시절을 딛고 만들어진 음식이 오늘날에는 모두가 즐기는 인기 음식으로 자리 잡은 셈입니다. 꿀꿀이 죽은 단순한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존이었습니다. 하루를 버티게 해 주던 힘이었고, 서로 나누며 살아가던 공동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접하는 밥상 위의 반찬들과 따뜻한 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땀이 있었습니다. 꿀꿀이죽 한 그릇에는 그 시절을 견뎌낸 서민들의 삶과 희망, 그리고 내일을 위한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닌, 오늘 우리가 가진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만드는 살아있는 교훈입니다.